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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동네풍경배달/사물

동네풍경_ #1.사물 : 글

수진동 여행기①

[[잡동사니 낭독회] 


저는 작은 집들을 좋아합니다. 집집마다 내 놓은 화분이나, 조금씩 다른 지붕을 살펴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진동은 정말 흥미로운 동네였습니다. 마치 다른 이들의 삶과 추억 속을, 이리저리 가르마를 타며 걷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과 건물 골목들 중에서, 우선 여러 물건들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 100원 만큼의 시간_ 커피 자판기

스타벅스니, 엔젤리너스니 하는 대형 커피 체인이 도시를 점령한 이 시대에, 수진동에는 가장 목이 좋은 동네 한 복판에 커피 자판기가 놓여있습니다. 색이 바랜 커피 사진 아래, 손으로 쓰여진 가격표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카페라떼는 300원. 아이스 커피는 400원.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비켜주세요.’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뒤로 물러서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주 능숙한 손길로 투입구에 동전을 넣고는, 개구리처럼 한껏 움츠렸다가 점프를 하며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저는 깜빡 사과를 하는 것도 잊었습니다. 꼬마가 뽑은 것은 얼음. 100원 어치의 얼음이 종이컵 가득 담기며, 사라락 사라락 소리를 내는 것이 몹시 듣기 좋았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도, 도서관 옆으로 이런 커피 자판기가 줄을 지어 서있었습니다. 시험기간이면 자판기 앞이 사람들로 북적대곤 했습니다. 1분, 혹은 3분. 100원어치의 음료를 홀짝 홀짝 나누어 마시는 시간동안, 잠시 시험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커피자판기의 매력은, 그 짧은 여유의 순간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공유한다는 것이겠지요.

가방을 뒤져 나온 300원으로 카페라떼를 뽑아 꼬마 근처에 앉았습니다. 꼬마는 이미 얼음을 양 볼에 메이도록 물고는, 아드득 아드득 소리를 내며 깨물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문득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에는, 햇볕이 따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봄인 줄만 알았다가, 소년의 얼음 깨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 여름이구나.’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돌림노래와 아주머니 콰르텟 _ 목욕탕 의자와 평상

수진동에서는 골목과 골목이 만나는 곳마다, 평상이 하나씩 보입니다. 대개는 슈퍼 앞입니다. 제가 돌아 다녀본 결과, 가장 큰 평상은 [수진 쌀 슈퍼]앞에 있는 것으로, 싱글 침대 사이즈 정도 됩니다. 그리고 평상마다 아주머니 서너분이 마늘을 까거나, 시금치를 다듬고 계셨습니다. 평상 근처에 놓인 형형색색의 목욕탕 의자들이나, 잔뜩 쌓인 푸성귀들이 어수선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아주머니들의 움직임과 손길이 정갈하고, 매끄럽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 두 분은 마늘 껍질을 깝니다. 다른 한 분은 다 까진 마늘을 모아 물로 헹굽니다. 그리고 나면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계신 분이 종이 위에 마늘을 쏟아, 햇볕에 말립니다. 이 모두가 동시에, 그리고 누구의 지휘도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평상의 재미있는 점은, 아주머니들의 구성진 이야기를 듣는 데 있습니다. 또 이야기 중간 중간 들리는 ‘후렴구’도 즐겁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페라나 뮤지컬과 비슷합니다. 한 분이 허리를 펴며, ‘아이구, 이 놈의 허리를 새 걸로 갈아치우든지 해야지.’하고 선창을 하면, 다른 분들이 ‘아이구, 허리야.’하며 코러스를 넣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15분쯤 뒤에 또 다른 아주머니가 어깨를 두드리며 선창을 하시면, 다른 분들이 몇 번이고 처음하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 코러스를 넣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아주머니 한 분이 제게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뭘 적는거야?’하고요. 수진동에서 뭐 재밌는 일 있나 찾고 있어요, 하고 말씀드리니, 모두 같이 ‘텔레비에서 나온 거야?, 카메라는 안 찍어?’하고 예의 그 코러스가 들렸습니다. 저는 마치 무대에 불려나간 청중이 된 기분으로 멋쩍고 어정쩡하게 웃으며 ‘아니요. TV에서 나온 것은 아니에요.’하고 간신히 대답했습니다.



• 골목 전시회_주차금지 표지판

아파트 단지에 살 때와, 주택가에서 살 때의 가장 다른 점은, 아무래도 주차 시스템 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주택가에서도, 호수 별로 주차 구역을 지정해 주기도 한다지만, 아직까지 수진동에서는 오래된 주차 룰만이 적용되는 것 같았습니다. 오래된 주차 룰 첫 번째. 집 앞 골목은, 집 주인에게 우선권이 있다. 두 번째, 주차를 하려는 이방인은 우선권을 가진 이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 는 것인데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곳곳마다 세워진 주차 금지 표지판입니다.

사실 오래된 동네에 가보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수진동의 주차금지 표지판은 좀 신기했습니다. 하나하나 몹시 개성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반 지하 주택 앞에 ‘창을 막지 말아주세요.’라고 간곡히 적힌 헝겊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정성스럽게 나무 판자를 다듬어 만든 것에서부터, 커다란 돌 위에 페인트로 글씨를 써 놓은 것도 있었고, 낡은 의자 두 개를 맞대어두고 화분을 올려둔 것도 보았습니다. 마치 미술관의 야외 마당에서 열리는 설치미술 전시회에 초대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 기분으로 걷다보니, 일상적으로 ‘주차금지 표지판’을 떠올렸을 때의 부정적인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고, 동네 사람들 모두가 ‘주차금지’라는 테마를 갖고 각자의 예술감각을 뽐내며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 전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까지 해버렸습니다.



• 오프라인 SNS_ 재활용 망

수진동에는 다른 주택가와는 다른 특이한 풍경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집마다 걸린 초록색 망입니다. 골목어귀에 서서 바라보면, 양편으로 조로록 늘어선 초록색 망들 때문에, 얼핏 바닷가 마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보면, 조개나 물고기는 없고 플라스틱 용기와 캔들이 담겨있습니다. 일종의 가구 별 재활용 휴지통입니다. 통이나 봉지가 아니라 망이기 때문에, 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점이 재밌습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바라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오늘과 어제를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홍색 세제통이 담겨있다면, 얼마 남지 않은 빨래 세제를 세탁기에 탁탁 털어넣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핏물이 밴 플라스틱 용기를 보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고기를 굽고 쌈을 싸먹으며,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식사를 상상하게 됩니다. 골목을 걸으며 집집마다 걸린 초록색 망을 구경하다보면, 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모양새로 사는 것 같아도, 각자의 하루는 이토록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초록색 망에 담긴 것은, 서로 달리 보낸 시간의 흔적인 셈입니다. 초록색 망들이 늘어선 골목은 일종의 오프라인 SNS고요. 예쁘고 멋진 것들만 찍어 올리는 온라인 SNS보다도, 얼룩진 병이나 찌그러진 캔이 담긴 이 초록색 망이야 말로,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풍경이 담긴 역사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