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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동네풍경배달/골목

동네풍경 _ #3.골목 : 글

수진동 여행기➂

[한여름 오후 2시, 수진동 골목의 기록]



'골목'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제게는 언제나, 캄캄한 밤의 가로등입니다. 회사에 다니며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 골목 어귀의 노란 가로등에다 대고 ‘나는 왜 이렇게 사나’하고 한탄하던 슬픈 기억입니다. 헌데 수진동을 걸을 때마다, 문득 문득 생경한 낮의 골목과 마주치곤 합니다. 바쁜 아침과 치열한 낮이 물러간 후의 잠깐 내쉬는 한숨 같은 골목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나와 앉아 부채질을 하는, 책가방 멘 아이들이 과자부스러기를 나누어 먹는, 모두의 앞마당같은 그런 골목입니다. 그 때마다, 어쩐지 신기하면서도 왠지 모를 그리움같은, 그런 마음이 드는 까닭은 아마도 그런 풍경들이 제 기억 저편, 어린 시절의 어느 기억과 닮아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여, 이번 이야기는 수진동 골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수진동 공원로 1210번길 14-1번지 ‘동네 슈퍼’앞 사거리에서 기록한 골목의 냄새, 소리, 사람, 사건, 날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PM 2:32 줄무늬 셔츠를 입으신 아저씨, 동네슈퍼 앞 평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다. 프로젝트 파니, 모두 연신 손 부채질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다. 골목에는 우리뿐이다. 너무 더워 아이스크림을 사먹다.


* PM 2:41 지난 번, [프로젝트 파니] 카메라로 찍었던 아이와 다시 만나다. 바지와 티셔츠가 온통 척척하게 젖어있어, 까닭을 물었더니 물놀이를 하였다 한다. 아이에게서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다.


* PM 3:04 사진 작가가 아이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건네다. 아이가 쑥쓰러워하다 사진을 받아들고는 동네 슈퍼안으로 들어가, 동네슈퍼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화를 빌려 통화를 하다. 우연히 들리는 내용이, 엄마에게 집 문이 잠겨있으니 데리러 와달라고 하는 듯 하다. 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골목길을 걸어 사라지다.


* PM 3:22 골목은 오가는 이 하나 없이 고요하다. 태양빛이 거칠게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덥다. 현재 수진동 동네슈퍼 앞 기온은 35도.


* PM 3:30 아주머니 한 분이 통화를 하시며 지나가시다. 하얀색 캡 모자에, 보라색 고릴라 인형이 달린 가방이 앙증맞다. 골목이 너무나도 조용해서, 속삭이듯 통화하시는 목소리가 마치 작은 벌레가 웅웅대는 소리처럼 들리다.


* PM 3:45 골목에는 우리들 밖에 없다. 비릿한 땀 냄새가 골목을 채우고 있고, 냄새의 발원지는 나인 듯 싶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 기대하는 어떤 일이 없을 때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섭섭하다는 것을 깨닫다.


* PM 3:51 흰 가방과 니삭스를 신은 젊은 주민분이 지나가다. 흘끗 눈이 마주쳐서 어색하게 웃어보이다.


* PM 3:54 "신토불이 알밤을 세 됫박에 오천원씩 무료로 깎아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영양가있고 맛도 좋은 공주 토종 알밤을 차량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 알밤 판매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테잎 소리가 고즈넉한 골목에 울려퍼지다. 한 됫박에 이천원, 세 됫박에 오천원이면 살만도 한데, 아무도 사러오지 않다.


* PM 4:00 알밤트럭 아저씨, 밤을 하나도 못팔고 그냥 가시다. 트럭이 풀이 죽은 아이처럼 느릿 느릿 달려 사라지다.


* PM 4:05 알밤 트럭이 사라진 골목 어귀에서 아주머니 두 분, 아저씨 한 분, 어린 커플이 나타나 서로를 교차해서 지나가다. 이와 동시에 골목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다. 마치 다른 시공간이 펼쳐지듯이, 순식간에 골목에 소리와 냄새와 사람들이 들어차다. 달그락 달그락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맞물려, 간장 양념 냄새가 불현듯 퍼지다.


* PM 4:06 남자 아이 둘이 킥보드를 끌고 골목으로 나오다.


* PM 4:07 초록색 모자를 쓴 아이와 연두색 헬멧을 쓴 아이가 스케이트 보드를 가지고 나오다. 초록 대문집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바쁘게 나가시다.


* PM 4:12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고 골목을 헤집다. 안경을 쓰고 머리가 긴 여자아이가 헬멧을 쓴 아이와 인사를 나누다.


* PM 4:14 헬멧을 쓴 아이의 어머니가 골목에 내려와 택배를 받다. 택배 아저씨가 “전화 좀 받으세요”라며 질타하다. 헬멧 소년의 어머니는 "애들이 놀고 있어서 신경쓰느라” 라고 변명하시다가, 택배를 받아들고 올라가시다. 택배는 롤휴지 2묶음과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


* PM 4:15 아이들이 킥보드와 스케이트 보드를 끌고 사라지다. “어디로 가니?”하고 물어보자, 학교로 간다 한다.


* PM 4:18 아까 지나가신 아주머니가 다시 지나가시다. 하얀 캡모자와, 보라색 가방은 그대로인데, 슬리퍼에서 뾰족 구두로 신발이 바뀌다.


* PM 4:20 이 골목 최고 패셔니스타를 목격하다. 러플이 달린 원피스에, 레깅스를 입은 여자분. 레깅스는 북해의 성난 바다색처럼 새파란 색이고, 흰색과 보라색이 섞인 비즈 가방이 여름 햇살을 받아 파티장의 샹들리에처럼 반짝이다.


* PM 4:22 바퀴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화려한 캡모자를 쓰신 할머니가 지나가시다. 장바구니 속이 비었는지, 바퀴가 가볍게 흔들리며 이리저리 돌을 튀기는 소리가 들리다.


* PM 4:28 아저씨 두 분이, 지나가시다. 일행인 듯 한데, 서로 아무런 말없이 걷기만 하시다.


* PM 4:30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시다. 사이좋게 헬멧을 쓰신 두 분. 할머니께서 할아버지의 등에 꼭 기대신 모습이 흐뭇하다. 오토바이가 일으킨 바람이, 잠시 땀을 식혀주었지만 곧 다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지다. 현재 기온 31도씨.


* PM 4:38 골목에서 아기우는 소리가 들리다. 어느 집 아이일까 궁금하여, 귀 기울여보지만 소리가 골목에 메아리쳐 결국 알아내지 못하다.


* PM 4:40 동네 슈퍼집 아랫층에서 큰 웃음 소리가 들리다. 아주머니들 여러분이 모여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려, 갑자기 배가 고파지다.


* PM 4:44 프로젝트 파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다.


* PM 4:49 수진동 골목을 떠나다.


동네슈퍼 맞은 편 주차구역에 주저앉아 보낸 두 시간 남짓.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게 앞 화분의 그림자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길어지는 것을 관찰하며 보냈습니다. 하필이면 작정하고 골목을 기록해보기로 한 날이, 8월 들어 가장 더운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골목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반가웠고,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 그 뒤 소리며 냄새며 사람들이 골목으로 물밀듯이 차오르는 어느 순간에는,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처럼 왠지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아마 그 영화에 제목이 있다면, '골목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오후 4시'일테지요.

여러분이 이 글을 받아보실 때 즈음에는, 수진동에도 쌀쌀한 바람이 불어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고 있겠습니다. 그 때에는 또 다른 골목의 낮이, 밤이, 하루가 펼쳐질 것이 기대가 됩니다. 지금, 창밖의 골목에선 어떤 소리가 들립니까? 어떤 냄새가 골목에서 누군가의 허기를 채울 준비를 하고 있을지, 어떤 패셔니스타들이 골목길에서 런웨이를 하고 있을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그럼 쪽빛 레깅스를 신으신 언니도, 다정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 때 또 뵐 수 있을런지요. 해가 짧아진 동네슈퍼 앞 사거리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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