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풍경 _ #4.사람 : 시

2016. 10. 7. 17:172016 동네풍경배달/사람





할머니의 트랙






오후 4시, 할머니는 좁은 문을 나선다 지팡이로 박자를 맞추며 너른 운동장으로 가는 길 



할머니의 걸음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동네 개들이다 쫄래쫄래 할머니를 따라오며 "네가 키우는 사람은 밥을 잘 먹니?" "내가 키우는 사람은 툭하면 고개를 떨어뜨리더라" 속삭일 것 같은



가파른 골목뿐인 삶에 선물처럼 놓여 있는 운동장, 첫 발을 내딛는 할머니의 몸은 반으로 접혀 있다 지나온 시간을 향해 깊은 인사를 하는 것 같다   

 


할머니의 트랙은 반시계 방향, 할머니는 천천히 거슬러 오른다  "나야 그냥 살았지. 가락시장에서 안 해본 일이 없어......" 먼 시간, 더 먼 시간,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끝까지



걸어가면서 흩어지는 할머니, 점처럼 작아진 할머니가 지팡이에 매달려 있다 



그러다가도 환했던 기억, 빛의 구유에 담겨 있던 구간을 지날 땐 다시 걸음이 빨라진다 그림자의 허리가 유일하게 굽어있지 않은 곳이다 



할머니의 음악은 구름을 타고 흘러간다 맑은 하늘에서 불현듯 큰 비가 쏟아진다면 그건 할머니가 어두컴컴한 터널을 지나고 있기 때문



지금쯤 할머니는 어디쯤을 지나고 있을까 나는 진맥을 하듯이 할머니의 트랙을 짚어본다 고요한 떨림이 전해져온다 만지지 않아도 닿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 수진동에 갈 때마다 마주쳤던 할머니가 있다. 처음 뵌 날은 학교 벤치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두 번째 날엔 골목에 서서 손을 맞잡았다. “저 기억하세요?”물으니 “암, 암.”하며 골목 끝으로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내내 지켜보고 계셨다. 그 다음 수진동에 갔을 때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운동장을 돌고 계셨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는데 또 말을 걸면 배웅이 힘겨워질 것 같아서, 할머니가 운동장을 네 바퀴나 돌도록 그저 멀찌감치 바라만 보았다. 할머니의 걸음이 너무나 느리고 정확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햇볕이 폭죽처럼 부서져 내리는 오후였다. 그저 스친 인연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많은 마음이 쏟아졌다. 수없이 재생하게 될 트랙이 또 하나 생긴 것이다.




시인 : 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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